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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을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 사실 틀린 고민이 아닙니다. 작품 수만 수십 편이고 세계관도 제각각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처음 접할 때 순서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은 거 먼저 봤고, 그게 오히려 건담을 오래 좋아하게 된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건담을 본다는 것의 현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건담을 제대로 챙겨보는 건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본 넷플릭스에는 거의 전 시리즈가 올라가 있는 반면, 국내 OTT 환경에서는 판권과 심의 문제 등으로 볼 수 있는 작품 수가 크게 제한됩니다. 반다이 남코가 공식 운영하는 건담인포(GUNDAMINFO)에서 비정기적으로 공개되는 작품도 있지만, 언제 올라올지 알 수 없고 공개 기간도 짧아 타이밍을 놓치면 그만입니다.
제가 처음 건담을 접하던 시절에는 지금보다 상황이 더 열악했습니다. 만화책 연재본으로 먼저 접하다가 기체 디자인이나 주인공 그림체가 마음에 들면 그때서야 애니메이션을 따로 찾아봤는데, 대부분 만화책보다 애니 작화가 훨씬 좋아서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려웠죠. 마음에 드는 작품은 소장용으로 따로 구해두고 나중에 다시 꺼내 보곤 했습니다.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촌 덕에 새 시리즈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있습니다. 공식 채널이 아니라 지인 루트가 정보의 창구였던 셈인데, 그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진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팬들이 영상, 만화, 소설 등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소비하는 방식을 한국에서 그대로 따라가기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 건담인포(GUNDAMINFO): 반다이 남코가 운영하는 건담 공식 유튜브 채널로, 비정기적으로 작품을 무료 공개합니다. 단 공개 기간이 짧고 한국어 자막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 국내 OTT: 라프텔 등 일부 플랫폼에서 우주세기 계열 일부 작품을 한국어 자막과 함께 제공합니다.
- 미디어믹스(Media Mix): 한 작품을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 등 여러 매체로 동시에 전개하는 방식. 건담 시드(SEED)나 더블오(00) 계열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에서는 영상물 외의 콘텐츠 접근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우주세기, 어디서 끊고 어디서 이어야 할까
건담 시리즈를 이야기할 때 우주세기(Universal Century, UC)는 빠질 수 없는 개념입니다. UC란 지구 인류가 우주 식민지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시작되는 건담 특유의 연대 체계로, 이 세계관 안에 퍼스트 건담부터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까지 수많은 작품이 이어집니다. 건프라 매출 상위권도 시드(SEED) 계열을 제외하면 대부분 우주세기 계열 기체가 차지할 만큼 팬층이 두텁습니다.
문제는 진입 장벽입니다. 퍼스트 건담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뿌리 같은 작품인데, 바로 그 이유로 지금 처음 보는 분들에게는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에반게리온을 처음 보는 사람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을 느끼듯, 퍼스트 건담을 오마주 하거나 패러디한 작품이 워낙 많아서 오히려 원작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생기는 것이죠.
또한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감독 특유의 압축적인 대사도 장벽입니다. 여기서 토미노식 대사란, 함축적 의미를 극도로 짧은 문장에 밀어 넣어 한 번에 해독하기 어려운 표현 방식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도 전투씬이나 메카닉 디자인은 몰입에 문제가 없었는데, 캐릭터 간 대화 장면에서는 "이게 무슨 뜻이지?" 싶은 대사가 종종 걸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주인공 심리보다는 모빌슈트(Mobile Suit) — 즉 건담에 등장하는 인간형 전투 병기 — 의 디자인과 전투 연출에 더 집중하면서 봤습니다. 그 편이 스트레스도 없고 오래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제타 건담(Zeta Gundam)의 경우, 극장판보다 TV판을 권하는 시각이 있는데 저도 그 의견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극장판은 4부작 기획이 3부작으로 축소되면서 내용 전개가 지나치게 빠르고, TV판을 먼저 본 사람이 아니면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국내 OTT에서도 TV판 위주로 서비스 중이니 접근성 면에서도 TV판이 현실적입니다. 반면 건담 ZZ는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경로가 극히 드물어 처음부터 권하기가 어렵고, 기동전사 건담 F91은 4부작 중 1편만 극장 개봉 후 이후 이야기가 일본 만화로만 이어진 탓에 완결된 감상이 어렵습니다.
입문작 고르는 법과 실전 감상 전략
건담을 처음 보는 분들에게 "퍼스트 건담부터 순서대로 보세요"라고 말하는 건 솔직히 좋은 조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순서보다 중요한 건, 일단 자신이 멋있다고 느끼는 기체가 등장하는 작품을 먼저 보는 겁니다. 건담 시리즈는 기획 단계부터 건프라(GUNPLA) — 건담 플라스틱 모델, 즉 조립식 프라모델 — 판매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는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기체를 찾아 그 작품을 보는 것이 제작자 의도와도 맞아떨어집니다(출처: 반다이 건프라 공식 사이트).
건담을 전혀 모르는 분이라면, 신기동전기 건담 W 엔드리스 왈츠(Endless Waltz)를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총 3편짜리 OVA(Original Video Animation — 극장이나 TV가 아닌 패키지 소프트로 발매되는 애니메이션 형식)라 짧은 시간에 볼 수 있고, 윙 건담 제로의 디자인은 지금 봐도 압도적입니다. 기동전사 건담 SEED(시드)도 추천하는데, 21세기 건담 중에서 가장 세련된 캐릭터 디자인과 깔끔한 작화를 유지하는 작품이라 진입 거부감이 적습니다. 제가 직접 주변에 권해봤을 때도 이 두 작품은 거의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2021)를 목표로 하는 분이라면 중간 과정을 길게 가져갈 필요가 없습니다. 퍼스트 건담 극장판 3부작을 보고 역습의 샤아를 거쳐 하사웨이로 이어가는 경로가 가장 효율적입니다. 저도 퍼스트 건담 극장판 3부작은 재미있게 봤고, 지금 다시 본다면 같은 순서로 볼 것 같습니다. 우주세기의 세계관을 더 깊이 알고 싶다면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THE ORIGIN) OVA를 추가로 보는 것도 좋습니다. 디 오리진은 퍼스트 건담의 디자이너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가 직접 그린 만화를 원작으로 한 프리퀄로, 퍼스트 건담을 보기 전 세계관 이해를 돕는 데 효과적입니다(출처: 건담인포 공식 뉴스).
수성의 마녀(機動戦士ガンダム 水星の魔女) 같은 최신작 입문 자라면 본편 전 프롤로그 '요람의 별'을 먼저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일본에서는 웹으로 공개됐지만 한국에는 공식 번역이 없어 팬 번역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 프롤로그를 보지 않으면 본편 초반부가 뜬금없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건담은 본편 외 미디어믹스 콘텐츠가 스토리의 빈 부분을 채우는 경우가 많아, 한국 환경에서는 완벽한 감상이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미리 알고 보는 것이 속편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건담 입문자한테 제일 무난한 작품이 뭔가요?
A. 건담을 전혀 모르는 분께는 신기동전기 건담 W 엔드리스 왈츠를 먼저 권합니다. 3편짜리 OVA라 부담이 없고, 기체 디자인이 화려해서 거부감 없이 진입할 수 있습니다. 기동전사 건담 SEED도 캐릭터 디자인이 세련돼 입문작으로 실패 확률이 낮습니다.
Q. 우주세기 건담은 꼭 퍼스트 건담부터 봐야 하나요?
A.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역습의 샤아나 섬광의 하사웨이처럼 우주세기 연대기와 직접 연결되는 작품을 제대로 즐기려면 퍼스트 건담 극장판부터 흐름을 따라가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대사 문법이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전투씬 중심으로 감상하면 진입이 수월해집니다.
Q. 한국에서 건담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어딘가요?
A. 라프텔에서 퍼스트 건담 TV판, 제타 건담 TV판 등 우주세기 일부 작품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건담인포 유튜브 채널에서도 비정기적으로 무료 공개되는 작품이 있으니 구독 알림을 켜두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공개 기간이 짧고 한국어 자막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Q. 섬광의 하사웨이 보려면 뭘 미리 봐야 하나요?
A. 퍼스트 건담 극장판 3부작과 역습의 샤아를 먼저 보면 주인공 하사웨이의 배경과 동기를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역습의 샤아만이라도 먼저 보고 하사웨이로 넘어가는 것을 권합니다.
결론
건담 보는 순서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한국 환경에서는 "볼 수 있는 것"부터 보는 게 현실적입니다. 마음에 드는 기체 하나를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고, 그 작품이 재미있으면 세계관을 조금씩 넓혀가는 방식이 오래 건담을 좋아하게 되는 경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해왔고, 지금도 그 방식이 맞다고 봅니다.
언젠가 국내 OTT에서 전 시리즈를 한국어 자막으로 편하게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면서, 일단은 지금 볼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우주세기 관련 작품들을 시간이 생기면 다시 한번 처음부터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도 가끔 드는 걸 보면, 건담은 역시 한 번 빠지면 쉽게 떠나기 어려운 시리즈인 것 같습니다.